50대 중반의 정주철씨는 4개월 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이주했다. 중학교 1학년인 자녀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어학연수도 할 겸 이주를 결심한 것이다.
그는 비록 이주한 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편안하고 느린 성격이어서 한국에서 바쁜 생활 속에 찌든 마음을 트이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파트 단지 내의 헬스장, 수영장을 무료로 이용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골프를 치며 여가도 즐기고 있다. 그는 “언어 문제가 있어 약간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보다는 한 단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해외에서 노후를 보내겠다고 꿈꾸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국민소득이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면서 해외에서 생활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 근본 요인이다. 게다가 국민연금이 시행된 이후 공무원을 중심으로 연금 생활자들이 늘어난 것도 주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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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의 수트라 하버 리조트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서양인 부부. |
지난 9월 23~24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해외유학 어학연수박람회·해외이주 이민박람회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5만여명이 몰려들어 뜨거운 호응을 보였다. 학생과 학부모가 유학, 어학연수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그런데 행사장에는 학생과 학부모만이 아니라 50~60대의 중·노년층도 있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은퇴이민 설명회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9월 20일에는 고양시 킨텍스(KINTEX)에서 ‘2006년 고령친화산업 및 효 박람회(Korea Senior Life Expo 2006)’가 열려 다양한 실버산업과 함께 은퇴이민 상품도 소개됐다.
은퇴이민을 원하는 사람이 늘자 여행업계에서도 은퇴이민 설명회를 열고 있다. 롯데관광은 매주 금요일 말레이시아 이주 설명회를 개최한다. 고객의 신청을 받아 개최하는 설명회에서 말레이시아의 현지 물가, 부동산 소유 및 관련 절차, 이주비자 등에 관해 정보를 제공해준다. 매주 진행되는 이 행사에 매번 10~20명의 고객이 참여하는 등 은퇴이민에 대한 관심이 높다. 롯데관광 관계자는 “매일 5~10통의 은퇴이민 관련 문의 전화가 걸려온다”고 말했다. 11월 10일에는 대전에서 60~100명의 고객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한다.
최근 신문, 잡지도 은퇴이민 기사를 늘리고 있다. TV도 은퇴이민 프로그램 방영을 늘리는 추세다. 은퇴이민 관련 책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생애재무설계’(21세기북스) ‘성공을 꿈꾸는 한국인이 사는 법’(청림출판)에서는 은퇴이민을 노후 생활전략의 한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딱 3년만 해외에서 살아보기’(들마루)에서는 은퇴, 레저형 해외생활로 은퇴이민을 소개하고 있다. 은퇴이민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여 은퇴이민의 가이드 형태로 ‘은퇴이민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성인당)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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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민은 일본에서는 ‘연금이민’이라 불린다.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연금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일본 총무성의 2004년 조사에 따르면 연금 수입에 의존하는 부부의 월 평균 지출액은 25만7000엔(205만원)이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노후 생활을 하려면 월 37만9000엔(303만원)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40년간 국민연금을 넣어온 일본인 부부가 받는 연금은 월 평균 13만2000엔(105만원)에 불과하다.
연금에 대비해 높은 세금과 물가를 감당할 수 없어 물가가 낮으면서도 생활 여건이 비교적 괜찮은 곳으로 은퇴이민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도 높은 물가와 세금을 피해 해외로 은퇴이민을 간다고 볼 수 있지만 선진국과는 달리 국민연금제도가 아직 시작단계이기 때문에 공무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애초에 목돈을 가지고 이주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은퇴이민자 사이에 주목받는 지역이 동남아다. 동남아는 PC방, 식당 등 이민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많다. 또 싼 물가 때문에 굳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연금으로 어느 정도 생활을 할 수 있다. 저렴한 인건비로 가사도우미를 두고 하숙집을 운영할 수도 있다. 또한 기후가 춥지 않으며 골프나 스킨스쿠버 등 여가를 즐길 만한 여건이 좋아 ‘귀족생활’을 꿈꾸는 사람들로부터 각광 받고 있다. 특히 동남아는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가족관계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우리나라 특성상 왕래가 쉬운 동남아가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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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여행업계에서는 관련 상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대개의 경우 답사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현지 실정을 파악하고 이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투어는 지난 5월부터 동아닷컴, 조인스닷컴과 공동으로 해외체험답사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현지를 6~7일의 일정으로 답사한다.
비용은 150만~200만원 가량이다. 답사를 통해 은퇴이민 희망자들은 주택시설 및 병원시설을 방문하여 이민 후의 생활 여건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은퇴이민 관련 문의가 늘자 그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여 프로젝트를 고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주일 정도의 답사 기간은 짧아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장기 체류 프로그램을 준비 중에 있다”고 말했다. 롯데관광은 올 7월 말레이시아 은퇴이민 설명회를 개최하면서 말레이시아 이민답사 프로그램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20만원 정도로 5일간 답사 및 현지 설명회를 가진다.
베트남 전문 여행사 코비투어는 한류열풍으로 인해 베트남인이 한국인을 좋아한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베트남 은퇴이민 답사 상품을 내놓았다. 약 150만원으로 아파트 건설현장과 주변 위락시설을 둘러본다. 모두투어도 은퇴이민 관련 상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최근 한 여행사가 주최한 말레이시아 은퇴투어를 다녀온 주정철(61)씨는 아는 사람에게 말레이시아가 살기 편하다는 말을 듣고 은퇴이민 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답사를 다녀온 그는 “생활비도 저렴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다”며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여유가 넘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비자를 받는 데 필요한 4000만원의 예치금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부동산 임대 수입으로 생활할 계획이다.
최근 늘어나는 ‘해외 신(新)한인타운’ 조성과 해외 부동산 분양 역시 은퇴이민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올 3월부터 주거용 해외 부동산 취득 한도가 없어졌고 귀국 후 부동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폐지됐다. 5월에는 투자용 해외 부동산 구입까지 허용되면서 해외 부동산 투자 붐이 일었다.
이와 맞물려 한인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빌라와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 수요층은 자녀 어학연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 학부모나 은퇴자이다.
은퇴이민이나 은퇴 후 장기체류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세컨드 홈 형태로 동남아 주택을 분양받고 있다. 또 3월에 재경부가 해외투자 활성화를 꾀하면서 고령노인 및 동남아 은퇴이민을 위한 실버타운 건설, 의료기관 해외진출 활성화 등의 방안을 내놓은 것도 은퇴이민에 대한 수요를 고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동남아 각국도 한국인 은퇴이민자들을 맞이하는 데 힘쓰고 있다. 동남아 대부분의 국가가 관광산업이 핵심산업으로 자리하고 있고 은퇴이민자는 큰 소득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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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이민지로 각광받는 태국 후아힌의 스프링 필드 골프 리조트. |
태국은 은퇴이민 유치에 적극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태국이 은퇴이민자를 유치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롱스테이 프로젝트’이다. 태국 관광청 산하의 TLM(Thailand Longstay Management)은 태국 은퇴비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설립했다. TLM은 외국인의 이주 절차를 도와 서류와 입국 심사를 간소화한다.
또한 이주 후에도 현지 콜센터를 운영하여 여행 정보는 물론 시큐리티(보안경찰), 가정부 등 생활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롱스테이 프로젝트’ 외에도 태국정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엘리트 카드’도 발급하고 있다. ‘엘리트 카드’는 일종의 태국 VIP 회원권으로, 입국 절차 간소화, 골프장 무료 이용 등의 특혜를 2만5000달러의 가격으로 제공한다.
말레이시아도 은퇴이민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공식적으로 이민을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2003년부터 ‘말레이시아, 마이 세컨드 홈(Malaysia, my second home)’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을 유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사회사업방문패스(Social Visit Pass)와 멀티풀 엔트리 비자(Multiful Entry Visa, 복수 입국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2006년에는 프로그램 인기 상승에 따라 원스톱센터(One-stop center)를 운영하여 모든 행정절차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3월 1일부터는 종전 5년이었던 비자유효기간을 10년으로 연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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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의 휴양도시 골드코스트 해변의 고급 주택들. |
필리핀은 은퇴청을 두어 은퇴이민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특별 영주 은퇴비자(SRRV: Special Resident Retiree’s Visa)로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은퇴비자를 받을 수 있는 자격기준을 완화했다. 필리핀은행에 예치해야 하는 금액을 50세 이상의 경우 5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낮춰 은퇴이민자 유치에 나선 것이다. 또한 필리핀은퇴청의 한국사무소 업무대행업체인 ‘락소’는 사전 답사 프로그램을 두어 은퇴 이민 이전에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고 있다.
네팔도 은퇴이민자들을 겨냥해 올해부터 60세 이상 외국인이 은퇴 후 네팔은행에 2만달러를 예치하면 1년짜리 거주비자를 발급하도록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은퇴이민이 늘어날 것이 분명한 만큼 이들이 조기에 효과적으로 현지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대경제연구원 허만율 연구위원은 “은퇴이민은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일반적인 이민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며 “정부는 재외국민 보호 차원에서 현지 공관에 담당자를 두고 공신력 있는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들의 조기 정착을 돕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철 주간조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이 기사 작성에는 이성혁(연세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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