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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생활

“거실을 서재로” 집안의 품격이 달라진다

by robust_Lee 2006.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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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을 서재로” 집안의 품격이 달라진다
소파 치우고 책장·탁자 놔 … 아이들까지 저절로 독서습과 생겨
"나만의 서재를 갖고 싶다!"

식자층 대다수가 갖는 꿈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 소박한 꿈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일단 주거형태를 아파트로 보자. 방이 3개인 35평 아파트에서 4인 가족이 살 경우, 부부 방과 아이들 방을 하나씩 배분하면 남는 방이 없다. 서재를 만들래야 만들 공간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만일 노부모라도 모신다면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아파트에서 방이 4개 나오려면 최소한 40평은 넘어야 한다. 대도시에서 월급쟁이가 4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산다는 게 말처럼 쉬운가.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집이 좁아 서재를 만들 공간이 없다고 푸념한다. 이들의 의식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거실에는 안락한 소파가 있고 텅 빈 마루 건너편에는 텔레비전과 오디오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간 배치는 많은 가정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서울 광장동에 사는 서린바이오사이언스 대표 황을문(55)씨는 거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버린 사람이다. 황을문 대표는 부인 길시양(48)씨와의 사이에 아들만 셋을 두고 있다. 큰아들 국진은 대학 2학년, 둘째 국필은 고3, 막내 국돈은 중3이다.

황 대표가 거실을 서재로 꾸민 것은 2년 전인 2004년 초봄이다. 황 대표는 알아주는 독서광 CEO다. 독서법에 대해 특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서 노하우가 풍부한 사람이다.

황 대표는 3개월 전까지만 해도 33평의 아파트에 살았다. 현재는 50평대의 빌라에서 산다.

▲ 황을문씨 자택의 거실 풍경

거실이 서재로 바뀐 것은 늘어나는 책 때문이었다. 거실에는 보통 가정처럼 3인용 소파 하나와 1인용 소파가 두 개 있었다.

안방 책꽂이의 공간이 부족하자 책이 거실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번 거실로 나온 책들은 더욱 활발하게 그 수를 늘려나갔다. 황 대표는 거실용 책장을 주문했고 여기에 책을 정갈하게 꽂았다. 거실에 책장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거실에 어울렸던 소파의 자리가 어색해졌다.

부인 길시양씨의 불평도 커졌다. 안락하고 깨끗한 분위기의 거실이 책으로 인해 흐트러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도저히 둘 수 없는 책들은 어쩔 수 없이 황 대표의 사무실로 옮겨가야만 했다.

결국 부인 길시양씨는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우선 1인용 소파 두 개를 처분하기로 한다. 1인용 소파 두 개는 재활용센터에 맡겼지만 3인용 소파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3인용 소파를 책장 앞에 놓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울리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서 여기저기에 배치해 보았죠. 거실에 그렇게 잘 어울리던 소파가 일단 큰 책장이 거실에 들어오니 어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모양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3인용 소파의 처리 문제를 놓고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3인용 소파도 버리자고 했지만 부인은 그것만은 안 된다고 버텼다. 길씨는 “거실에 소파가 있어야지 손님이 오면 편하게 앉을 데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고, 황 대표는 “손님이 오면 오는 거지 왜 남들 눈을 의식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반박했다. 황 대표는 여기서 소파를 버리고 거실에 큰 탁자를 들여놓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길씨는 거실 한 가운데에 큰 탁자가 들어오면 거실을 지나다닐 때 불편하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그러다 남편과의 실랑이에 지칠 대로 지친 길씨는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거실 문제’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2004년 초봄, 탁자가 들어오는 날 길씨는 외출했다가 돌아왔다. 길씨는 소파가 있던 자리에 놓인 탁자가 책장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어머, 분위기가 괜찮네’라는 얘기가 나왔죠. 그날 저녁 서가에 책을 한 권 뽑아 탁자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정말 상상하지 못한 분위기였어요. 한편으로는 남편을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길씨는 그날 밤 남편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 문자메시지는 지금도 보관함에 저장되어 있다. 길씨가 휴대폰을 꺼내 그 날 설레는 마음으로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을문씨! 당신이 꾸민 거실에 머물다 보니 넘 좋군요.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네요.”

거실에서 소파가 사라지고 탁자가 등장한 이후 집안에는 눈에 띄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첫째는 가족 모두가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실용음악을 하는 둘째 아들 국필은 형과 동생에 비해 책을 잘 읽지 않았는데, 이날 이후로 책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가족들이 대화가 늘고 탁자에 앉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황 대표는 아이들에게 독후감을 쓰라고 권하지 않는다. 대신 읽은 책의 ‘독서 발췌 일기’를 쓰라고 한다. ‘독서 발췌 일기’란 책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고 책을 다 읽은 뒤 그 부분만을 다시 옮겨 적는 것을 말한다. 황 대표는 “밑줄을 그으면서 읽으면 저자로부터 ‘원 포인트 레슨’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저자가 책을 한 권 쓰려면 최소한 25년의 경험이 필요하다”면서 “한 달에 네 권의 책을 읽으면 100년의 경험을 간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1년을 독서하면 1200년의 경험을 얻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변화는 가족들이 서점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아빠, 오늘 서점 안 가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아이들이 서점에 가자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동행한다. 그는 “함께 가자고 할 때 가줘야 내가 가자고 할 때 따라간다”고 말한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재미와 사는 재미를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거실의 소파는 대개 텔레비전과 한 세트로 움직인다. 소파는 으레 텔레비전을 향해 열려 있다. 황 대표는 소파를 치우고 책장과 탁자를 놓았지만 거실의 TV는 없애지 않았다. 황 대표는 “TV가 있어도 큰 스포츠 경기 같은 것만 보지 오락이나 연속극은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인 길씨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거실 분위기를 보고 너무나 부러워하면서 자기집도 이런 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길씨는 손님들이 ‘서점 같다’ ‘도서관 같다’ ‘품격이 느껴진다’ 등의 말을 할 때마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둘째 아들 국필군은 “예전에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환경이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책에 손이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필군은 고3인데도 짬을 내서 2주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

황 대표처럼 거실에서 소파나 텔레비전을 밀어내고 서재로 바꾼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단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을 보면 권경현 교보문고 사장, 조병호 동양기전 회장, 이찬승 능률교육 사장, 건축가 김진애씨, 장영희 서강대 교수, 손정완 패션디자이너, 이경형 ‘LEE & Park’갤러리 관장 등이 있다.

황 대표의 경우처럼 ‘나만의 서재 갖기’는 결코 꿈이 아니다. ‘나만의 서재’를 가로막는 것은 아파트 평수도 돈 문제도 아니었다. 고정관념을 깨면 격조있는 서재가 펼쳐진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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