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다' 와 '300'의 맞대결 - 3월 세째주 개봉영화 2007-03-15 11:38 |
지난 주에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한편도 없어서 그랬는지 주말 박스오피스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약진했습니다.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 1위를 차지했고, 한국 영화는 설연휴에 선보였던 [1번가의 기적]이 유일하게 5위권 내에서 4위로 체면 유지를 했습니다. 한국영화 가운데 상반기에 눈에 확 띄는 기대작은 없고 할리우드는 이름만 들어도 보고싶은 대작 시리즈들이 줄줄이 포진하고 있네요. 이번주 그래도 어김없이 영화들은 개봉됩니다. 쏜다 박정우 감독은 1990년대 후반부터 명성을 날린 시나리오 작가 출신입니다. 영화계에서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감독이래야 진정한 ‘감독’ 대우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감독 지망생들은 시나리오 작가부터 시작해서 감독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글재주와 연출력을 두루 두루 갖추는 것이 긴 생명력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우 감독은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같은 독특한 설정의 코미디 시나리오로 영화계에서 ‘작가’ 브랜드를 확고히 확립한 몇 안되는 재능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다 2004년 이성재, 박솔미 주연의 [바람의 전설]로 야심찬 감독 데뷔를 했는데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쓴 잔을 마셨습니다. 청소년 시절 카레이서가 꿈이었던 만수는 윤리 교사인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 때문에 주눅이 들어 결국 얌전한 구청 공무원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해나갑니다. 교통법규 위반한 적 한번도 없는 이 남자에 대해 아내가 먼저 폭탄을 날립니다. 성실한 건 좋은데 재미없고 지루해서 같이 못 살겠다면서 이혼을 통보한 것이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구청에서 공무원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감원을 하는데 바로 자신이 그 대상으로 지목됐다는 소식을 과장에게서 듣습니다. 어릴 적 친구이자 직장 동료는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만수가 가로등 공사에서 과장이 미는 업체로 바꾸지 않아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만수가 잘렸는데 안타까워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동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송별회식 자리에서 이런 분위기에 못마땅한 만수는 결국 분노의 폭발을 선보이고 술김에다 홧김에 담벼락에 노상방뇨를 하다 파출소에 끌려갑니다. 전과 15범으로 어떻게든 교도소에 들어가고자 하는 특이한 별종 철곤과 마주치는데 철곤의 충고에 따라 도망을 치다가 다시 붙잡히고 이번에는 경찰 총까지 빼앗아 돌아다니며 생애 최초의 짜릿한 일탈의 밤을 시작합니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초반 3분의 1정도인 것 같습니다. 더 쓰자니 주절 주절 길어질 것 같은 우려가 있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과 이야기가 얽혀들어가며 점점 복잡해집니다. 결국 주제는 평범한 소시민의 짜릿하고 위험한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많은 설정과 인물들을 엮어 쓰는 능력은 돋보이지만 유기적인 결합과 결말이 주는 그래서 영화 전체가 제시하는 주제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주인공이 무단횡단을 감행하고 감시카메라를 부술때까지는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끼지만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고 커지면서는 보는 심정도 복잡해집니다. [폴링 다운], [델마와 루이스]등이 떠오른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파출소 경관으로 나오는 강성진은 어정쩡한 캐릭터로 뜬금없는 86학번 '386'음모론까지 주장합니다. 하지만 칭찬할 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감우성, 김수로의 연기호흡은 잘 들어맞고 특히 파출소에서 보여주는 김수로의 능청맞고 과장된 대사와 표정 연기는 따로 떼놓고 보면 분명 눈에 거슬리는 심한 오버인데 전혀 오버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김수로의 진가는 [흡혈형사 나도열]이나 [잔혹한 출근]같은 원톱 영화에서보다는 이런 투톱 영화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 경주 장면과 한밤에 도심을 가르는 실제 카 체이싱 장면은 많은 공을 들여 찍어 할리우드와 비교해도 손색 없을 정도입니다. 지치고 찌든데다 각종 규제와 규율에 갇혀 갑갑하게 사는 소시민들에게 대리 만족을 안겨줄 만한 흥겨운 영화가 될 수도 있었는데 결말의 무거움이 성공적인 진입을 가로막는 것 같습니다. 300 [신 시티], [데어데블]같은 만화책을 단순한 애들이 보는 만화책이 아닌 매니아 층까지 만들어내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는 프랭크 밀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 문명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와의 역사상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일반 극장판이 아닌 아이맥스로 봤습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디지털 리매스터링 기술로 수정 보완된 트루 블랙 화면’이라는데 미국에서는 60여개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상영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3-4개 상영관에서 선보일 예정입니다. 일반 극장판을 못 봤기 때문에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맥스에 걸맞는 액션 영화라서 그런지 경탄할 만한 수준의 화질과 음질을 보여줍니다. 배우들의 얼굴에 난 솜털과 땀구멍이 보이고 화살이 바로 내 옆에 날아와 꽂히는 듯한 생생한 사운드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거 자주보다보면 눈높이만 높아질 것 같습니다.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테르모필레 전투에 대해 잘 아실 겁니다. 페르시아의 2차 침략전쟁으로 용맹한 스파르타의 항전으로 아테네 같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이 문명을 꽃피우는 기반을 마련해 줬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제라드 버틀러]은 나약한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와 예언자, 신탁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300명의 정예병력만 뽑아 전장터로 나갑니다. 좁은 협곡에 진을 치고 숫자만 많은 페르시아 군대를 혼쭐을 내줍니다. 왕과 300명의 병사들은 무모하리만큼 용맹한 정신과 애국심으로 파상공세를 막아나갑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런 종류의 영화를 ‘샌들과 창’이라는 용어로 분류하는데 기존의 영화들과는 한차원 다른 업그레이드를 이뤄냈습니다. 일단 검은 블랙톤의 강렬한 화면과 뮤직 비디오 같은 감각적인 편집, 실감나다 못해 환상적인 전투장면 등을 갖추고 눈과 귀를 매혹시켜 목이 잘려나가는 장면에서 잔인하다는 느낌보다는 처절하게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신탁녀가 등장하는 장면은 여배우의 미모와 감각적인 몸짓, 현란한 편집으로 턱 빠지고 침 까지 흘릴뻔 했습니다. 신탁녀와 여왕도 매력적인데 배에 선명한 ‘왕’자가 새겨진, 젊은 날의 조지 클루니를 연상시키는 훌륭한 외모의 제라드 버틀러도 매력적입니다. 페르시아 군대를 흉측한 괴물 정도의 야만족으로 표현하는 서구중심주의의 편견과 '무조건 나를 따르라’ 거나 ‘까라면 까라’는 식의 군사문화의 전체주의를 미화하는것 같아 다소 못마땅하지만 적절한 소재를 감각적으로 연출해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입니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왕은 300명 전사들에게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로 배불리 먹어둬라’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300명 전사들 가운데 취사병들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페인티드 베일 [300]이 확실한 남성 취향 영화라면 이 영화는 확실한 여성 취향의 영화입니다.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왓츠가 주연을 맡았는데 이 두 배우가 그만 영화의 취지에 120% 공감해 공동 제작자로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모 평론가는 20자 평에서 ‘부부클리닉의 월드 투어판’이라고 적었습니다. 너무나 실감나는 스토리에 19세 이상 시청가에 걸맞는 야한 설정으로 저도 부부클리닉을 가끔씩 즐겨보는 입장에서 120% 공감가는 표현입니다. 고결한 품성이지만 차갑고 재미없는 성격의 영국 의사 월터(에드워드 노튼)는 무도회에서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키티(나오미 왓츠)와 결혼을 하고 상하이에 있는 연구소 소장으로 먼 해외 근무를 떠납니다. 남자는 결혼해야할 때라서 했고 여자는 부모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고자 결혼했으니 첫눈에 반했다느니 평생 반려자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남편은 연구에만 몰입하느라 가정을 등한시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감옥같은 생활을 하던 키티는 바람둥이 영국 외교관(이 배우, 진짜 바람둥이란 이런 것이다 할만한 용모입니다.)과 불륜을 저지르고 월터는 이 사실을 알고 절망합니다. 월터는 중국 시골마을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자진해서 의료봉사를 결심하고 키티에게 죄값이라도 치르게 하려는 심정으로 억지로 함께 갈 것을 명령합니다. 이국적인 중국의 시골의 아름다운 풍광속에서 이들은 점점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부부간의 갈등과 이해, 상처를 치유하는 인간의 마음과 희망을 다룬 원작소설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는 잔잔한 템포의 멜로 드라마입니다. 에드워드 노튼의 깊고 허망한 눈빛과 꾸미지 않은 나오미 와츠의 매력이 잘 조화를 이룹니다. 이렇게 쓰고보니 분량이 꽤 되는군요. 옛말에 '나이 먹을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라'고 했는데 반대로 점점 말이 많아지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
남상석 기자 ssnam@sb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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