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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생활

천사’가 되어 떠난 33세 주부

by robust_Lee 2007.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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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되어 떠난 33세 주부
  • 환자 14명에 생명과 빛 나눠줄 예정
    뇌사 상태 빠지자 신장·각막 등 기증… 헬기로 긴급이송해 수술
    ‘뇌수막염’ 치료 받던 중 의식 회복 못하자 유족들 “많은 사람 살리자”
  • 이지혜 기자 wise@chosun.com
    사진=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입력 : 2007.04.20 00:18 / 수정 : 2007.04.20 03:01
    • #4월 16일 밤 10시. 제주시 제주대학병원 중환자실.

      “엄마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신단다.” 영원한 작별이란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홉 살 난 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일곱 살짜리 딸은 차마 병원에 데려 오지도 못 했다. ‘당신 고생 많았소. 아이들은 내가 잘 키우리다.’ 강모(38·자영업)씨는 마음 속으로 아내와 인사를 나눈 후 아들의 손을 꼭잡고 중환자실을 나섰다. 장모와 처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 서방, 그리 하게. 많은 사람 살릴 수 있다면….” 강씨는 서울의 삼성서울병원의 장기 이식 전문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정을 내렸습니다. 가족 모두가 아내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동의했어요. 절차를 밟아 주세요.”

      지난 3월 27일 감기를 유난하게 앓는다 싶던 아내(33)가 새벽에 갑자기 구토를 심하게 했다. 급하게 서귀포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병원측은 감기 후유증일 수 있다며 좀더 두고 보자고 했다. 목이 아프고 귀까지 안 들린다던 아내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서귀포의 더 큰 병원으로 옮겼더니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뇌를 보호하고 있는 막에 세균이 침범한 것이다. 이후 항생제 치료를 계속했지만 아내는 좀처럼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지난 5일 제주시에 있는 제주대학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아내는 열흘이 지나면서 심장만 겨우 뛰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지난 한 달은 강씨에겐 믿기 힘든 악몽의 시간이었다. “서귀포 집에다 아이들 재워 놓고 제주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차를 몰면서 한 시간 내내 울었어요. 이제는 아내를 편히 쉬게 놓아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강씨는 장기 기증을 결심하게 된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 #4월 17일 오전 11시.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옥상.

      강씨의 연락을 받은 삼성서울병원 응급의학과와 외과팀은 분주히 움직였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뇌사자를 옮겨 올 팀을 짰다. 응급의학과 의사, 장기이식센터 의사, 간호사 그리고 응급의료용 헬기를 조종할 기장·부기장이 한 팀이 됐다. 이 병원 응급의료헬기팀장 송형곤 교수는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를 신속히 운송하기 위해 의료용 헬기를 이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을 출발한 의료헬기는 오후 2시가 넘어 제주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의료진은 환자 상태를 확인 한 후 다시 서울로 출발했다. 강씨도 함께 헬기에 올랐다. “의식이 없다곤 해도 아내를 혼자 외롭게 보낼 순 없잖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오후 5시. 삼성서울병원 본관 옥상에 헬기가 도착하자 외과 의료진이 이들을 맞았다. 그러나 장기 이식을 하려면 최종 뇌사 판정을 받아야 한다. 병원 내 뇌사판정위원회가 꾸려지고 1차, 2차 검사를 실시했다. 심장, 신장, 간, 췌장, 각막 등 상태가 나쁘지 않아 모두 기증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

      하지만 뇌사 판정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뇌파 검사에서 미세한 뇌파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신경과 이광호 교수는 “의학적으로 다시 살아날 가망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뇌파가 감지되면 뇌사 판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4월 18일 정오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

      강씨 아내는 상태가 점점 나빠지더니 18일 낮 12시를 넘기면서 심장 박동이 완전 멎었다.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은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장기이식센터장 이석구 교수는 “심장 박동이 멎는 순간 장기는 급속히 손상된다”고 말했다. 결국 안타깝게도 아내의 심장, 간, 췌장 등은 살려낼 수 없었다. 의료진은 그러나 신장(콩팥)과 4장의 심장 판막, 혈관 6개와 눈의 각막 2개를 얻는 데 성공했다. 신장 하나는 36세 남자 환자에게 곧바로 이식했다. 다른 하나는 신장 이식을 원하는 환자가 대기하고 있는 서울아산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졌다. 나머지 장기들은 일단 병원의 조직은행에 보관됐다. 아내의 장기는 모두 14명에게 새 생명을 찾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씨가 다시 울먹였다. “오래 버텨 준 아내가 고맙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감정이 북받친 듯 그는 말을 쏟아냈다. “돈 벌어서 호강시켜 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요. 아이들 아침 밥 먹이는 것 함께 챙기고, 따뜻한 말도 해주고, 놀러도 같이 가고 그랬어야 했는데….” 강씨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말 없이 성실한 사람이었죠. 마지막까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 사람 뜻이라 믿어요. 아이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엄마로 남을 겁니다.” 하지만 강씨에게 베푼 자의 표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아내의 빈 자리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본인과 아내의 이름을 밝히는 것마저 거절했다.
    • '천사'가 되어 떠난 33살 주부 장기기증의 모습을 담았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헬기로 뇌사자를 이송하는 과정과 함께 젊은 생을 마감하며 장기를 기증한 한 아름다운 주부와 남편의 이야기를 본다. /조선일보 정경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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